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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

An old question

유정아 (미술사)

2009 개인전 오래된 질문/ UM갤러리

 

 

 

김병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신사동 UM갤러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입구 오른쪽 플랭카드에서 보았던 흰색 오랑우탄과 노랑 페인트를 뒤집어쓴 펭귄이 관람자들을 맞이한다. 함께 나란히 서있기는 하지만 왠지 서먹해 보이는 그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받게 되는 느낌은 '낯설음'이었다. 그러나 이 낯설음은 단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갖게 되는 그런 일반적인 '낯설음'과는 다른 종류의 '서걱거림'인 듯했다. 이 '낯설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는 여러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작업 매체의 다양성! 개인전이 아니라 마치 여러 작가의 전시를 합쳐 놓은 것처럼 다양한 매체로 표현된 작품들이 동일한 장소에 함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났던 오랑우탄과 펭귄은 입체적 조각물의 형태로 바닥에 놓여있고, 바로 왼쪽에 인접한 벽에는 거대한 흑백 사진이 두 점 걸려 있으며, 오른쪽에 조그맣게 마련된 방에는 탁자 위에 작가가 지녔던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소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 바로 앞 벽에는 벽면 액자에 여러 조각물들이 부착되어 있는데, 작가의 작품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부조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낯설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이 정서가 단지 매체의 다양성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전시들은 단일한 어휘들로 설명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파라오의 가면을 연상시키는 금빛 동상들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신화에 대해 말하려는 듯 보이다가도, '누가 이성을 결정하는지'에 관해 묻고 있는 긴 인용구들을 보고 있으면, '논리를 벗어나 있는 직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며, 마치 이 전시의 주인공인양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오랑우탄과 펭귄들의 무심한 표정과 제스추어 속에서는 '소외와 결핍'을 읽어낼 수도 있다.

 

이 전시에서 작가가 제기하고 싶어 하는 '오래된 질문'은 무엇일까?

이전 작업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설명과 평론가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설명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성’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직관? 현실에 대한 재해석? 소외와 결핍으로부터의 치유와 회복? 정체성의 근원에 대한 탐구? 가상과 현실의 동요? 지식인에 대한 비판? 인터뷰를 통해 작가는 오랫동안 문학, 그 가운데에서도 사무엘 베케트와 이오네스코의 글들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으며, 그 자신 과거에 시 창작에 적지 않은 노력을 경주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들은 '언어'를 시각화 해 온 작업일까?

나는 그의 낯설음이 두 세계의 '결합'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 세계가 공존할 때 발생하는 '간극과 차이'를 사유하는 일이다. 가령 과 같은 작품에서는 불사의 전통 탑과 원시시대의 동물의 군집이 함께 공존한다. 이들은 두 이미지 모두 현대세계에 어울리지 못하는 삐걱거림을 보여준다. 탑은 그 자체 설령 '전통'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인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등장하는 원시 동물 무리들도 우리 동시대에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이 두 이미지는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오히려 그 '이질성'이 그 둘을 묶어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문은 두 개가 아니다>라는 작품은 또 어떠한가. '不二門'이라고 뚜렷하게 한자로 새겨진 전각이 보이는 사찰의 문 한 가운데는 기대치 못한 광경이 우리를 기다린다. 바닷가를 유유히 산책하고 있는 펭귄 한 마리.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세계의 만남과 조우. 전적으로 이질적인 두 세계를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는 작가의 능청스러움. 바로 이 지점과 틈, 균열에서 새로운 사유가 발생한다. 혹은 보는 이들은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시대에 '만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단 두 이미지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매체와 매체가 주는 이질감 또한 그러하다. 조각으로 만나는 펭귄과 사진에서 만나게 되는 펭귄의 모습은 도저히 같은 종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라는 제목을 달고 흑백 사진 속에서 긴 목을 늘어뜨린 말의 이미지는 <파편들>이라는 제목 하에 슬픈 눈만 드리운 파편화된 이미지 조각으로 다시 등장하면서 연속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그 두 이미지들은 이질적인 정서를 갖게 만든다.

혹은 장르와 장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은 또 어떠한가. 그가 전시 서문에서 길고 길게 인용해 놓은 사무엘 베케트의 글들과 영문들을 보자.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순간은 그 글들을 눈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한 포털 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는 그의 전시 소개 동영상에서 음성으로 들었을 때였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들처럼 그 인용구들에서 정작 강조되고 있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라기보다는 그것을 입으로 낭송하면서 혹은 귀로 들으면서 느끼게 되는 그 리듬과 울림이었다. 가만가만 그 문장들을 입 속으로 어휘들을 읊조리고 있으면, 그 이질적인 단어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마찰은 마치 서로 무관심해 보이면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오랑우탄과 펭귄처럼 서걱거림을 안겨다준다. 그것은 이전 전시(2008. 10. 29-11. 04) 에서는 '흔들림'으로 표현되어졌던 이미지와 맥을 같이 한다. 두 세계가 만날 때 단일한 평면에서 이어지지 못하고 미세하나마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처음부터 '단일하고 안정된' 세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조차 여러 시간과 공간의 중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과거와 현재의 시간들이 겹쳐져 있으며, 원시 시대부터 누적된 생물들의 진화의 흔적들은 우리 현대인들의 몸 속 깊이 누적되어 왔다. 연속적인 면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듯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의 중첩에서 느껴지는 그 이물감을 작가의 말을 빌면 '파편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파편화는 오랑우탄의 피부가 주는 느낌과도 동일하다. 전시장에서 실물을 보기 전에 나는, 그 오랑우탄의 피부가 매끄러운 석회질 덩어리일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직접 보았을 때 그것은 마치 컴퓨터 화면의 픽셀들처럼, 혹은 바둑판처럼 조각조각의 연결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방향성을 따져보는 일이다. 겉으로 보아 고르지 않고 서걱거리는 파편들의 모음. 그러나 그것은 한 연속체가 조각조각 찢어지는 분열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여러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때로는 낯설고, 이질적이며 서걱거리더라도, 심지어 서로 맞지 않아 일부는 떨어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 방향성을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작가가 인터뷰에서 강조했던 치유와 회복의 궁극적 통행로가 될 것이다.

copyright KIM Byung-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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