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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고 지우는 세계

Shake and Erase the World

최건수 (사진평론)

2011 사진을 바꾼 사진들 / SIGONGART

 

 

 

사진과 시, 하나는 비 문자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예술이다. 둘은 어울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듯하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입장이다. 문장을 장면으로 구체화하는데 가장 적합한 매체가 사진이라고 한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진은 솔직하게 작가의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있는 매체다.

 

작품 하나를 읽어 보자. 〈Shake-fire/C〉는 맹렬한 불길 속에 책들이 타고 있는 것을 찍었다. 불이 흔들리면서 타오르는 것은 어떤 고정된 구조도 해체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뜻으로는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탄생과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죽음과 신생新生, 어느 쪽일까? 흔들리는 불꽃은 책들을 불사르고 있다. 질서 정연하게 꽂혀진 많은 책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책들은 지식을 의미하고 그것들을 쓴 지성인들, 소위 먹물들을 은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식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일까?

타도해야 할 대상일까? 중국의 진시황도 실용서적만 남기고 당대의 모든 학술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학자들의 비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먹물들은 생산성이 없는 말장난으로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갈 길을 더디게 했다. 이 작품은 소고기 파동으로 일어난 촛불 시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될 때, 광화문에 컨테이너 바리케이트가 쳐졌다. 청와대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이다. 소위 ‘산성’이라고 불렸던 컨테이너였다.

작가는 광화문 사거리에 수평으로 늘어선 거대한 컨테이너 앞에서 강렬한 벽을 느꼈다. 그리고 그 벽 앞에서 이 땅의 많은 지식인이 방관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던 것이 ‘도대체 지식은 이 시대에 무엇인가?’ 그리고 ‘지식인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무엇인가?’였다.

이 시대를 위한 지식이 아니라면 그때의 지식은 무엇인가? 지식의 침묵, 그토록 무력한 흔들림이라면 차라리 화형을 시키는 것이 어떨까? 차라리 불살라 버리자. 꼭 소고기 광우병이 아리어도 된다. 침묵하는 무기력한 지성을 불살라야 할 대상이다. 진시황은 요란한 지식을 태웠고, 작가는 침묵하는 지식을 태운다. 이 작품은 컨테이너 박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지만,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화형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탐구로 나타났다.

 

이 작품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다와 모더니스트는 늙지 않는다〉다. 그리고 사진과 조각이 결합된 작품이라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조각이라는 3차원 예술, 즉 공간을 점유하는 예술이 평면의 사진 액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진이라는 사각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조각은 처음 봤다. 그리고 다시 액자 속에서 조각이 튀어 나온다. 마치 창문틀을 넘어 나오는 사람처럼 사진 속에 갇혀버린 조각, 그것은 평면화된 조각이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뚫고 나오는 조각, 평면과 예술 공간이 동거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액자 속의 바다는 잔잔하다. 잔물결만 모래밭 위로 올라왔다가 슬며시 내려간다. 문제는 이 조각 속에 묘사된 인체, 즉 그림자다. 오른쪽 어깨 위로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과 액자 밖으로 떨어뜨린 팔은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왼손에 든, 화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이 그려진 책에서 어떤 지식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이 지식인이 작가가 상정한 모더니스트에 초상이리라. 은둔자 모더니스트는 인적이 끊어진 바다에서 홀로 흐느적거린다. 지식인으로서 무기력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삶에 터를 떠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작품의 타이틀은 바다도 모더니스트도 늙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다와 모더니스트는 같은 의미이다.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바다의 물결이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을 꿈꾸는 모더니스트라면 잠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각과 사진이 결합된 작품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확대된다. 그의 최종 작품은 한 장의 사진과 동일한 복사본의 사진으로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두 장의 사진이 한 셋트가 되어 작품을 위한 재료로 준비된 것이다. 조금 더 설명을 얹는다면, 이 두 장의 사진을 일정한 크기로 미세하게 잘라냈다. 그리고 잘린 조작들을 교대로 보드에 붙여 나갔다. 동일한 이미지가 교대로 대지 위에 붙여진 셈이다.

형식적으로 이런 기법은 쓴 사람은 그리스 출생의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다. 같은 사진을 쓴 것은 아니다. 찍을 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여러 장의 사진을 세로의 같은 크기로 잘라내어 대지위에 붙인다. 일종의 멀티플 이미지 인데, 리듬과 왜곡의 효과가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김병걸의 작품도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의 동일한 사진을 아주 미세하게 잘라 붙임으로서 하나의 사진처럼 보인다. 이어붙인 사진에서 떨림이나 파동이 밀려온다.

옵아트Optical Art와 같은 착시 현상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훨씬 정밀하게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왜 모든 작품을 미세하게 나누어서 재구축하느냐는 것이다. 마치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건물의 형태가 드러나듯이 재료를 해체하고 (대상을 해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조각이 그렇고, 시가 그렇고, 사진이 그렇다. 작가는 그것을 ‘흔들기Shake’라 하고, 그 의미는 세계를 무화無化 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계를 없애 버리는 것, 해체하는 것,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해서는 세계가 지워지지 않는다. 사진에서 이미지 지우기는 흔드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흔들리는 대상을 찍을 수도 있고, 사진을 찍는 쪽에서 느린 셔터 속도를 이용하여 대상의 흔들림을 유도할 수 도 있다. 그는 이러한 통상적인 사진 기법을 쓰지 않는다. 반대로 세계를 심도 있게 예리하게 찍고, 이후에 작업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화의 한 컷 한 컷들은 모아 움직이게 하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유도한다. 미술 평론가 심상용은 이러 흔들기를 그에 독특한 미학으로 보고 흔들기가 드러내는 것은 윤곽의 후퇴, 대기의 미동, 세계의 증폭으로 이해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윤곽은 흐려지고, 아니 풀어지면서 세계는 흩어지고, 그럼으로써 작가의 사유 속에서 새롭게 구축된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 펭귄 한 마리가 뒤뚱뒤뚱 나타난다. 남극에서 무리지어 사는 펭귄이 저 홀로 떨러져 나옴은 어떤 의미일까? 펭귄은 텅 빈 도시를 걷기고 하고, 예기치 않게 숲에 나타나기도 한다. 펭귄과 도시, 펭귄과 숲, 모두 어울릴 수 없는 한 쌍이다. 그의 상상이 세계에서는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어울려 한 세상을 만든다. 그러나 그곳은 쓸쓸한 곳이다. 그의 무릉도원은 고독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왜 그가 세상을 지우고 고독에 성을 다시 쌓는 작업을 택했는지······,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작가의 성城인 것을! 그는 삶의 서늘한 그늘을 훔쳐보는 자가 아닌가 싶다.

copyright KIM Byung-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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